"정보기관이 쓸데없이 정치에 개입하고 위로는 정부 고위당국자가 국회 여야 정치인 주위에 4중 5중의 정보망을 치고, 전화 도청하고, 미행을 하고 있는 사실, 이것을 우리가 마땅히 지금 타파하지 않으면 앞으로 우리는 정보정치의 그물 속에 들어가서 중앙정보부의 눈치를 살피지 않고는 말도 할 수 없고 사람 노릇도 할 수 없다 이겁니다."
박정희 정권의 위세가 서슬 퍼렇던 1965년 7월 31일의 국회 속기록이다.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형욱을 겨냥하여 "쓸데없이 정치에 개입한다"고 발언한 국회의원은 바로 김대중(DJ) 전 대통령이었다.
'마흔 살 김대중'의원의 성토는 계속 이어졌다. 그는 한일협정 비준동의안 심사 특위에서 "총리는 중앙정보부가 본연의 임무에 위배되고, 그 임무를 초월해서 국내 정치에 관여하고 있는 사실을 아는가. 정보정치를 방지하고 지양하는 방법은 무엇이냐. 이 점에 대해 답변하라"고 당차게 요구했다.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상대방이 김형욱이기에 더욱 그랬다. <동아일보>가 발간한 '남산의 부장들'에 따르면, 김형욱은 "국회에 출석해서 답변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의사당과 연결된 집무실 스피커를 통해 의원들의 언동을 체크할 뿐이었다".
일부 공화당 의원들은 국회에 출석한 김형욱에게 고개를 깊이 숙여 가며 깍듯이 예의를 차렸다. DJ의 용기 있는 발언이 있었던 바로 그 해, 고급요정에서 한 공화당 의원이 술 취한 김형욱에게 심한 구타를 당했을 정도다. DJ로서는 음지에서 양지를 '쬐는' 사람들과의 악연을 자초했던 셈이다.
정보정치를 타파하겠다는 정치인을 정보정치가 가만 둘 리 없었다. 1971년 대선에서는 보안사가 나섰다. 당시 보안사령관이었던 김재규 중장은 대통령 선거전이 한창이었던 4월에 '서승-서준식 간첩 사건'을 조작한다. 목표는 DJ였다. 서승씨는 "없는 사실을 자백하라고 고문했다"며 "김상현씨 집에 기거했다는 꼬투리를 잡아 김대중씨와의 관련 여부를 집중 추궁했다"고 공포스런 과거를 회상한다.
2년 뒤에는 중정이 나섰다. 이번에는 이후락. 바로 1973년 8월에 발생한 '김대중 납치 사건'이다. 중정은 일본에 머무르던 야당 지도자를 호텔에서 납치했고, 129시간 동안 DJ는 죽음의 공포에서 떨어야 했다.
공교롭게도 DJ의 '정보정치' 발언 15년만인 1980년 7월 15일. 전두환의 계엄사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정권 찬탈을 위해 정부 전복을 획책한 사건으로 조작하여 DJ등 37명을 내란음모혐의로 기소한다. 그 해 8월 군법회의, 아니 '정보정치'는 마침내 DJ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하지만 '쓸데없는' 공작은 결과적으로 독재정권의 생명을 단축시켰다. DJ납치사건은 미일(美日) 정계로부터 박정희 정권에 대한 신뢰도를 떨어뜨렸고, 신군부의 '사형 선고' 역시 국제적으로 DJ에 대한 인지도만 높이는 결과를 초래했다.
결국 미국도 맘대로 하기 곤란한 정치인으로 DJ를 성장시킨 1등 공신. 사실상 '정보정치'였던 셈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65년 7월 31일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여의도통신= 이정환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