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의 귀족들이 포로나 노예들의 죽음을 담보로 하는 싸움을 붙여 놓고 열광했던 바로 그 장소가 원형경기장이다. 지금은 고대 문화유적으로 보존되고 있지만 그 경기장에서 죽어간 사람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처음에는 포로들 사이에서 벌어졌던 서바이벌 게임이었지만 나중엔 귀족들이 검투사를 소유하고 훈련하면서 '살벌한 오락'이 되었다.
아프리카의 건장한 검투사, 소아시아에서 붙들려온 창잡이, 스칸디나비아 반도 바이킹의 후예, 공주를 흠모하다 반역자가 된 몰락 귀족의 아들 등 수없이 많은 검투사들이 원형경기장의 열광을 위해 사육되었다. 로마는 그들의 강성함과 정복의 열매를 그렇게 장렬하게 그러나 부질없이 산화시켰다.
2000년이 흐른 뒤 원형경기장 대신 축구전용구장으로 유럽은 당시의 열광을 재연하고 있다. 로마의 무력 대신 초국적 자본이 주도하고 있다는 점, 검투사 대신 프로축구 선수들이 결전을 치른다는 점, 그리고 죽음을 담보로 하지 않고 그 대신에 안전한 게임의 룰이 존재한다는 점. 그것은 아마도 2000년의 시간이 빚어낸 진화가 아닐까 싶다.
아무튼 인간은 모여서 열광해야만 하는 본능이 있는 모양이다. 귀족들의 전유물이었던 원형경기장의 살육 게임은 이제 시민 누구나 볼 수 있는 월드컵 게임으로 보편화되었다. 그래서 나는 전 세계에서 모여든 유럽의 명문구단 선수들에게서 로마제국 검투사의 모습을 떠올리곤 한다.
아프리카의 건장한 아데바요르가 발산하는 그 원시적 에너지, 아시아 동방의 나라에서 온 이방인 박지성이 던져주는 독특한 상품성, 그리고 베컴이나 지단처럼 본 바닥 출신으로 공주의 사랑을 받을 만한 선수들…. 그들은 원형경기장에 출전했던 검투사들보다 더 넓은 곳에서 더 많은 사람의 시선을 모으며 세계인들은 열광시키고 있다. 지구가 하나의 커다란 원형경기장이 된 듯한 느낌이다.
지금의 열광과 함성 속에는 무엇이 감추어져 있을까? 그 허점이 이 문명을 쇠하게 하는 건 아닐까? 축구는 확실히 자본주의와 가장 잘 어울리는 게임인 것 같다. 무한경쟁이지만 거기에 스스로를 지키는 룰이 있다. 실력이라는 기회의 평등, 그것이 축구장 안에서는 공평하게 주어진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지금 이 문명을 대변하는 키워드가 아닐까.
축구장에서 그것이 깨지면 관중은 외면한다. 자본주의도 마찬가지다. 실력 있는 자에게 기회의 평등이 주어지지 않으면 스스로를 지킬 수 없다. 지금 월드컵 관중들은 이 룰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박지성도 실력만 있으면 맨체스터에서 뛸 수 있는 것이다. 만약 동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뛸 수 없게 된다면 오늘의 월드컵 파워는 현재의 반쪽에 불과했을 것이다.
공정한 룰과 실력 있는 자에게 주어지는 기회의 평등이 축구장에서만이 아니라 월드컵이 끝나고도 우리 사회의 곳곳에서 벤치마킹 되기를 기대해 본다. 많은 관중들이 축구에 열광하지만 조금만 더 들여다보면 그 열광을 가능케 하는 것은 축구의 공정한 룰과 기회의 평등이다. 스위스전이 짜증나는 것은 심판에 의해 그런 룰이 훼손됐기 때문일 것이다. /이철우(전 국회의원, 북부비전21 대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