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성농업인 불평등 문제와 개선방안' 토론회가 지난 29일 국회 헌정기념관 대강당에서 사단법인 생활개선중앙회(회장 조희숙) 주최로 열렸다. 토론회에 참석한 한 여성 농업인의 신문을 보고 있는 모습이 젊은 여성을 내세운 한 화장품 광고와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 한승호기자
"농사짓는 여성은 농업인이 아니다?"
“26년간 농사를 지었는데 저보고 농업인이 아니래요. 남편의 보조자밖에 안된다고 하네요......”
농사를 짓다 초등학교 교사로 복직한 황경희(충북 괴산군)씨는 당시 심정을 토로했다. 황 씨는 복직과 함께 호봉을 획정하는 단계에서 26년의 농업 경력을 고스란히 날려야했다. 농업에 종사한 사실을 증명할 제도적 장치가 없었기 때문이다.
현행법(농업·농촌기본법시행령)이 규정하는 농업인은 △1천 제곱미터(약 300평)이상의 농지를 경영 또는 경작하는 자 △농업경영을 통한 농산물의 연간 판매액이 100만 원 이상인 자 △1년 중 90일 이상 농업에 종사하는 자 중 하나이다.
황 씨는 경작 농지가 4천-7천 평이고 26년간 농사를 지었지만 ‘이를 증명할 서류가 없다’는 것이 농업인 불인정 사유이다.
‘한 가정 2인 이상 농업 종사 시 농지는 세대주 앞으로 작성돼야한다’는 농업·농촌법 시행령에 따라, 세대원인 황 씨 명의 농지는 한 평도 없다. 연간 판매액 100만 원 이상을 증명하기 위해 현금 출납부·농산물 판매 공책 등을 보였지만 공식 문서가 아니라 소용이 없었다.
또 1년 중 90일 이상 농업에 종사한 사실은, 공인된 인증기관이 없고 인증방법이나 절차에 명문규정이 없어 증명 서류를 제출할 수도 없었다. 대신 면장·이장의 확인 도장을 받겠다고 했으나 이 또한 비공식 문서라 인정받을 수 없었다.
황 씨와 비슷한 처지에 놓인 여성농업인은 전국 백만 명이 넘는다. 이들의 지위향상을 위한 ‘여성농업인 불평등 문제와 개선방안’ 토론회가 지난 29일 (사)생활개선중앙회 주최로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열렸다.
발제를 맡은 농촌진흥청 김경미 연구관은 “농가여성의 93%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지만, 이 가운데 11%만이 농업종사사실을 인정받을 수 있는 법적 자격을 가진다”며 문제의 심각성을 드러냈다.
그는 농업종사사실 증명 방법을 현실화·다양화 하는 규칙 조항 신설을 제안했다. 가족 내 농업활동과 경영에 대한 합의를 문서화한 가족경영협약서, 개인 농업활동이 나타나는 기록물(가계부, 영농일지 등) 등을 읍면동사무소에 제출한 다음 현지 심리조사를 거쳐 인정을 받게 하는 것이다.
또 농업인의 기준을 경영주, 공동경영주, 가족종사자, 임금근로자, 예비농업인 등으로 세분화하자는 안도 내놓았다. 그렇게 되면 현재 여성농업인 대부분은 공동경영주 혹은 가족종사자로서 농업인의 지위를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토론자로 참석한 한국여성농업인중앙연합회(한여농) 심점순 정책부회장은 이와 관련, “여성농업인이 공동경영주보다는 가족종사자로 고착화될 우려가 있다”며 “다른 직업을 가지거나 농업에 확실히 종사하지 않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공동경영주로 인정해야한다”고 지적했다.
이날 정부 대표로 토론에 참석한 농림부 구조정책과 이상만 사무관은 법 개정에 있어 다소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 사무관은 “농업·농촌정책 수혜 대상 변화를 우려해 당분간 농업인 정의에 관한 기본법 규정은 개정하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2년 전의 입장을 되풀이했다.
그는 또 영농경력 증명 방법 개정과 관련, “신중한 검토를 거쳐야 하지만 필요한 경우 농업·농촌기본법 하위법령 개정을 통해 관련 제도를 보완할 수 있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여의도 통신=신수임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