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들의 '추투(秋鬪)'가 연례행사이긴 했지만, 올해의 분위기와 투쟁 강도는 예사롭지 않다.
농민들의 시위가 이어지면서 전국의 고속도로와 주요 국도들이 막히고, 농촌지역 시·군청 앞마당이며 읍·면사무소 마당은 시위용 쌀포대에 의해 점령당했다. 이런 가운데 농민시위에 참가했던 한 농민의 급작스런 죽음의 원인을 놓고 농민단체와 경찰 사이의 진실게임이 정국을 더욱 긴장시키고 있다.
농심이 불타오르기 시작한 것은 초가을부터였다. 올해부터 정부의 쌀 수매제도가 폐지되면서 햅쌀 값이 30%까지 폭락하는 사태에 직면하자 농민들의 격분은 도를 더해 갔다. 급기야 정부가 비축미 매입량을 1백만석 더 늘리겠다고 처방전을 내 놓았지만, 요동치는 쌀 시장을 다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런 와중에 지난달 23일 쌀협상 비준동의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정부 측은 "비준동의안은 쌀시장 개방을 10년 동안 미루면서 그 기간 동안 농업 체질을 변화시키려는 데 의의가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말을 곧이 듣는 농민은 거의 없다. 농민들은 비준동의안 통과를 농업 포기의 선언이자 농촌 몰락의 '쓰나미 서곡'으로 보고 있다.
우루과이라운드협상 후 10년 동안 정부가 농업구조개선을 위해 쏟아 부은 1백조원이 도리어 농업 경쟁력을 떨어뜨리고 농민들을 빚더미로 내몬 결과를 체험하고 목도했던 농민들은 불안에 떨 수밖에 없다.
따라서 지금까지 정부가 내건 농업 비전으로 성난 농심을 달래기란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향후 10년 동안 농촌에다 1백19조원을 쏟아 부어 농업을 회생시키겠다는 것도, 3년 동안 쌀값 하락 폭만큼 보전해주겠다는 것도 문제의 본질에서 벗어난 대책이다.
이젠 지난 10년 동안 실패를 거듭한 농정과는 전혀 질을 달리해야 한다. 이제부터라도 농업의 새 틀을 짜야 한다는 목소리에 정부는 귀를 기울여야 한다.
지난 2월 농촌경제연구원은 농업의 다원적 기능의 가치가 연간 28조3천억원에 달한다는 보고서를 냈다. 이는 2003년 기준 국내농업총생산(GDP) 20조5천8백48억원의 1.4배에 달하는 액수이다. 농업의 다원적 기능은 농업이 농산물을 생산하는 주 기능 이외에 환경 및 생태계 보전, 농촌 경관 유지, 식량안보, 국민정서 함양, 전통문화의 계승발전 등 공공재를 생산하는 기능을 말한다.
우리 사회가 농업을 품에 안기 위해선 농업의 다원적 기능에 대한 사회 인식을 널리 확산시키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다. 농업문제가 농민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국민 전체의 이해와 유관한 것으로 설명돼야 하고, 농업의 다원적 기능이 현실감 있게 토론돼야 한다. 이런 기조 하에 농업정책을 세워야만 농민들의 마음을 살 수 있다.
'도시가 꽃이면 농촌은 뿌리'라는 말은 농민들의 자긍심을 강제하는 용도로 오용돼 왔다. 하지만 '뿌리가 시들면 꽃도 시든다'는 말은 만고의 진리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