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신하는 도깨비

마음속에 도깨비 한 마리 사는 것 같다. 변신에 능한 놈이다. 순한 놈이 되었다가 성질 고약한 놈이 되었다가 자주 돌변한다. 온순형 순한 놈과 다혈질형 성질 고약한 놈 중 어느 놈으로 변신하느냐에 따라 그날이 조용하거나 시끄러워진다.

생각한 후에 행동하는 이성(理性)과 달리, 감정은 생각할 겨를 없이 사람을 조정하는 도깨비다. 이 놈을 눌러야 할 이성이 감정도깨비 놀음에 꼭두각시가 된다. 이성이 감정도깨비를 휘어잡지 못하면 중심을 잃고 그놈의 다혈질 도깨비모드에 끌려가고 만다. 그날의 기분은 감정도깨비가 온화한 성격이냐, 톡톡 쏘는 다혈질이냐에 달려있다. 하루가 시끄럽게 지나가거나, 조용히 탈 없이 지나가느냐가 그 놈 손안에 있는 것이다. 마음을 지탱하고 있는 이성의 줏대는 그때마다 힘없이 무너진다. 그래도 그놈은 마음을 어지럽히며 장난질을 일삼다가, 다시 나를 정갈하게 제자리에 놓아주곤 한다.

그이와 내가 둘이 함께 있으면 도깨비 두 놈이 늘 문제를 일으킨다. 온순형으로 변신할 때는 서로가 화기애애한 분위기다. 서로 주거니 받거니 말이 잘 통한다. 그야말로 지상낙원이 된다. 그러다 말 토씨 하나 틀리게 되면 사나운 도깨비로 변신한다. 남편의 감정도깨비는 늘 기가 팔팔하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지나가는 법이 없다. 생각하는 이성은 이미 없다. 그는 상대의 말을 받아들이는 방법이 나와 전혀 다르다. 이 점이 나를 무척 힘들게 한다. 당연히 두 도깨비끼리 언쟁의 난투극이 벌어진다. 그러면서도 나는 되도록 나의 생각을 입 밖으로 내지 않으려 조심한다. 좀 조용히 지나가기 위해서다. 이건 내가 터득한 생존전략의 지혜다.

하지만 어느 한쪽의 다혈질 도깨비가 확실히 득세를 하면 기분이란 판은 난장판이 된다. 그 두 놈이 한데 말씨름을 보이면 당신이 틀리고 내가 옳고 서로 언어가 달라지며 엎치락뒤치락 판이 요란하다. 결국 상처를 낸다. 위대한 이성은 어디 가버렸나. 오로지 힘으로 밀어붙이는 것만이 힘을 유지하는 비법인 듯하다.

최근 그이와 나는 자주 부딪쳐 사이가 좋지 않은 순간들이 많았다. 지루한 장마처럼 궂은 날이 계속되었다. 이리변신 저리변신 한마디로 말해서 남편의 감정도깨비가 다혈질을 드러내며 내 안의 감정도깨비를 자극시킨 것이다. 내 안의 온순형 도깨비가 참다못해 버럭 화를 내지르면 또또또 하며 억누른다. 말 토씨 하나에 민감한 남편의 감정도깨비에 나는 지혜롭게 살살 기어든다. 그러다가도 내 감정도깨비가 못 참을 지경이 오면 말꼬리 잡고 뱅뱅거리는 것이다. 자주 다혈질을 드러내는 남편의 감정도깨비와 내 감정도깨비가 전에 없이 윙윙거리는 요즘, 무슨 문제가 있는가?

그러던 어느 날 내가 비뇨기과를 찾을 일이 생겼다. 그날도 남편과 동행했다. 의사의 진찰을 마치고 앉아있는데, 남성 갱년기를 의심하라는 문구가 번쩍 눈에 들어왔다. -성욕과 발기력 감소, 기분변화, 피로감, 우울증, 분노, 지적능력의 감소, 집중력 저하 등- 열 가지 정도의 내용이다. 그 열 가지 내용을 하나하나 읽어보니 남편의 요즘 행동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래서 남편한테 의사의 진찰을 한번 받아보라고 권하자 흔쾌히 받아들여 의사의 진료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약을 처방받아 그날 밤부터 한 알씩 먹기 시작했다. 거짓말같이 남편 안의 감정도깨비가 좀 온순해졌다. 며칠째 계속 온순하다. 말씨도 부드럽고 말 토씨 하나도 너그럽다. 넓은 바다에서 내가 마구 헤엄치고 다니는 자유로움을 느끼고 있다. 내 안의 감정도깨비도 마음이 턱 놓였다. 역시 의사의 진료를 받기 잘했어. 남편의 감정도깨비가 다혈질이고 사나웠던 건 갱년기 증상이었던 이유도 있었구나 싶다. 아니 갱년기 도깨비 때문이었던가 싶다. 온순한 감정도깨비와 사니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시작된 듯 기쁘다. 비로소 이성이 눈부시게 돌아온 것 같다.

그 사나운 감정도깨비의 정체가 갱년기 도깨비였다니, 감정도깨비야! 이제 변신 그만하고 온화한 마음으로 살았으면 좋겠어. 너도 그간 갱년기와 싸우느라 힘들었지. 이제는 버럭버럭 감정도깨비에 흔들리지 말고, 차근히 생각하고 행동하는 이성의 줏대를 세우고 살아가고 싶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