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태산 자락에서 태어난 나는 스스로 ‘불태산 촌놈’이라고 말해왔다.

그만큼 불태산은 나에게 생(生)의 탯줄이요, 영혼의 샘터라고 할 수 있다. 불태산에 탯줄을 묻고, 불태산을 바라보면서 성장하며 꿈을 키워왔기 때문이다.

한재초교 2학년 때 삼촌의 손을 잡고 처음 불태산 꼭대기에 올랐다.
그 전까지 불태산은 내게 있어 세상을 구분하는 하나의 기준이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과,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를 구별짓는 경계가 곧 불태산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불태산 꼭대기 능선 길에서 바라본 건너편 세상은 어린 나에게 큰 충격이었다. 미지의 세계로 여겨왔던 그 곳의 모습 또한 그때까지 살아왔던 이 세상과 다를게 없었던 까닭이다.

저 높은 곳을 넘어서까지 세상이 펼쳐진다는 것 또한 놀라움, 그 자체였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정말 얼마나 넓은 것일까? 어릴적 나의 의식을 지배하는 풀 수 없는 의문이었다.

이렇듯 불태산은 나의 꿈을 만들고 꿈을 키운 모태였다.

재작년 가을 전남 행정부지사직을 던지고 당시 담양·곡성·구례를 지역구로 총선에 출마했다.
말 그대로 자의반 타의반의 결정이었다.

출생지가 담양군 대전면 서옥리 2구니까 담·곡·구 지역에서 서쪽 끝 동네 출신인 셈이었다.

자의반 타의반이라는 건 당시 현역의원이 서울로 지역구를 옮겨 무주공산이 된 자리에 출마해 달라는 고향 선후배들의 강권이 큰 몫을 했기 때문이다.

큰 뜻을 펼쳐보자는 각오로 출사표를 던지고 열심히 뛰던 지난해 1월, 한 후배가 용한(?) 스님이 있다며 선거 전망을 한번 들어 보잔다.

마침 인근 지역을 들렀던 터라 좋은 말씀이나 들어볼 요량으로 스님을 찾아뵀다.

스님은 나를 찬찬히 보시더니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러면서 “기운이 많이 부족하니 기가 센 산에 꼭 다녀오라”며 불태산 등반을 권하셨다.

당시 내게 유리한 선거 분위기에 ‘당선은 따논 당상’이라는 말을 기대했다가 솔직히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

게다가 워낙 급박한 선거상황에서 산에 오를 시간을 만들지 못하고 말았다.
스님의 조언을 무시했던 탓일까?

그동안 정성을 쏟아온 담양·곡성·구례 지역구가 공중분해돼 버렸다. 새 지역구인 담양·장성·함평·영광 선거구에 나섰지만 결국 후보경선에서 떨어졌다.

아무리 바빴어도 불태산에 올랐어야 했다.
기운을 보강하고 든든하게 맞섰더라면 지역구를 지킬 수 있지 않았을까?

늘 마음 먹은대로 이뤄왔던 인생에서 처음 맛본 실패의 쓴잔이었다. 한동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마음을 가다듬고 세상에 다시 나와 가장 먼저 했던 일이 불태산 산행이었다. 금년 새해 새날 첫 나들이도 불태산으로 정했다.

뒤늦게라도 기운을 보강하려면 내 자신의 모태라 할 수 있는 불태산에 올라야 했다.
그래서인지 요즘 많이 씩씩해졌다는 말을 듣곤 한다.

스스로 불태산 촌놈이라고 말하는 나에게 한 친구가 “촌놈이 뭐냐”며 점잖게 ‘불태산인’이라고 하라는 충고 아닌 충고를 해줬다.

가끔 불태산인이라는 닉네임을 쓰기도 하지만 아무리 곱씹어보아도 나는 불태산 촌놈이다.
불태산은 나의 모습이요, 기운이요, 영혼이기 때문이다.

가까운 날, 좋은 사람들과 불태산에 또 오르리라. 처음의 나를 만든, 또다른 나를 만든 그 불태산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