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을 여는 강연'은 "좋은 사람이 좋은 세상을 만듭니다"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있는 한국인간개발연구원(KHDI)의 조찬강연을 지상중계하는 코너입니다. KHDI가 지난 32년 동안 매주 목요일 오전 7시에 1530회(금주 기준)나 진행해 온 조찬강연은 국내 최다 회수를 기록하며 최고 권위의 강연회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지난해 12월 20일 롯데호텔 2층 에메랄드룸에서 강지원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 공동대표가 ‘좋은 정책의 무한경쟁과 대선 이후 미래비전’이라는 주제로 강연한 내용을 정리한 이 기사가 독자들의 교양 쌓기에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편집자주)

“좌우로 5~10년마다 정권교체 돼야 선진국”

“매니페스토(Manifesto)의 어원은 라틴어의 마니페스투스(manifestus)이다. 당시에는 ‘증거 또는 증거물’이라는 의미로 쓰였다. 구체성(具體性)을 가리키는 이 단어가 이탈리아로 들어가서 마니페스또(manifesto)로 정착됐는데, 그때는 ‘과거 행적을 설명하고 미래 행동의 동기를 밝히는 공적인 선언’의 의미로 사용됐다. 이 단어가 영어권 국가에 소개된 것은 1644년이다. 영국 보수당 당수인 로버트 필이 1834년 ‘유권자들의 환심을 사기 위한 공약은 결국 실패하기 마련’이라고 경고하면서 구체화된 공약의 필요성을 강조한 적이 있는데,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매니페스토 개념은 바로 그때 정립됐다. 특히 1848년 발표된 공산당선언(Communist Manifesto)을 계기로 매니페스토가 대중적인 용어로 자리 잡았다.”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강지원 변호사는 매니페스토의 어원과 역사를 설명하는 것으로 강연의 서막을 열었다. 강 대표는 “선거에 임하는 정치인들이 ‘싸움’만 할 것이 아니라 ‘공약’을 가지고 선의의 경쟁을 벌이는, 즉 진정한 의미에서의 ‘정책 선거’를 해주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매니페스토운동을 시작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선진국이라고 해서 처음부터 정책 선거를 한 것은 아니다. 매니페스토운동을 하면서 접하게 된 문헌과 자료에 따르면, 민주주의 선진국으로 알려진 영국에서도 1900년 초반까지 부정부패가 심각할 정도로 위세를 부리면서 ‘이상한 선거’가 진행됐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선진국에서 그러한 적폐를 극복하고 민주주의와 ‘좋은 선거’를 뿌리내리게 하는 데 무려 200여년의 시간이 소요된 셈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렇게 많지 않다. 지난 60년 동안 진행된 한국의 선거 역사를 돌아보면 ‘고무신 선거’, ‘막걸리 선거’, ‘돈 봉투 선거’의 악몽이 떠오를 것이다. ‘투표함 바꿔치기’, ‘릴레이 투표’와 같이 기상천외한 부정행위가 독재정권에 의해 저질러짐으로써 ‘민주주의의 꽃’인 선거가 유린당하기도 했다.”

‘제왕적 대통령’ 제도 바꿀 때 됐다

적어도 한국에서 그렇게 천박하고 노골적인 부정선거는 이제 사라졌다. 분명한 진전이다. 그러나 여전히 갈 길이 멀다는 것이 강 대표의 냉정한 진단이다. 그는 “지역 선거와 이미지 선거 등 이른바 ‘바람 선거’를 극복하는 것이 우리가 해결해야 할 남은 과제”라면서 “무얼 보고 찍어야 하는지, 구체적인 기준을 유권자에게 제시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매니페스토를 도입한 동기도 바로 여기에 있다. 여기에는 공직선거에 출마한 사람은 당선이 되면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 공약을 구체적으로 밝혀야 하고, 유권자는 투표를 하면서 반드시 이 공약을 판단의 근거로 삼아야 한다는, 사회적 약속이라는 대전제가 깔려 있다. 이러한 매니페스토가 국내에 처음으로 도입된 것은 지난해 치러진 5.31지방선거였다. 당시 16개 광역자치단체장 후보자들은 빠짐없이 매니페스토 협약식에 참여했다. 이번 대통령선거에서도 각 정당 대표와 후보들이 두 번이나 매니페스토 선거를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선거 와중에 가장 많이 등장한 ‘한 방’이라는 용어에서도 잘 알 수 있듯이, 이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다. 한 방에 날아간 것은 이명박 후보가 아니라 매니페스토였다.”

각 정당과 후보가 공약과 정책을 표방했다고 해서 무조건 합격 판정을 내리지 않거니와, 매니페스토에는 일정한 조건이 있다. 공약 수립과 실천의 시기, 절차, 재원, 목표, 우선순위 등을 구체적으로 밝혀야 한다. 밑도 끝도 없이 “서민이 잘 사는 좋은 세상을 만들겠다”거나 “경제 성장률 몇 퍼센트를 달성하겠다”고 선언하는 ‘한 줄짜리 공약’은 낙제 판정을 받는다.

“그렇다고 아무런 성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번 대선에서 각 정당과 후보가 제시한 공약과 정책을 꼼꼼하게 비교해 보았더니, 과거에 비해서는 상당한 구체성을 확보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많은 문제점과 부작용이 드러나긴 했지만, 파상적인 네거티브 공세에도 불구하고 이번 대선에서 경제 문제가 승패를 갈랐던 것도 따지고 보면 유권자들이 넓은 의미에서의 정책적인 사고를 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결국 복지도 좋고 분배도 좋지만 지난 10년 동안 진행된 국가정책의 방향을 실패로 규정하고, 일단 성장을 통해 ‘파이’를 키우고 보자는 새로운 정책을 국민이 최종 선택한 것이기 때문이다. 선진국의 경우를 보더라도, 좌파 정책과 우파 정책이 약 10년을 주기로 자연스럽게 서로 왔다 갔다 한다.”

이 대목에서 강 대표는 의미심장한 분석과 전망을 내놓았다. 우파 정권이 10년 만에 다시 등장했지만 이 정권의 유효 기간 역시 10년을 넘기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경고한 것이다. 국민들이 보기에 국가 운영을 잘 하면 15년이 갈 수도 있고, 잘 못하면 5년 만에 당장 바뀔 수도 있을 것이라는 부연 설명도 덧붙였다. 이쯤에서 등장한 것이 바로 ‘뱃멀미론’이다.

“나는 한국인이 지금 모두 한 배를 탄 채 항해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바다에는 파도가 있기 때문에 배가 때로는 왼쪽으로, 때로는 오른쪽으로 흔들릴 수밖에 없다. 그런데 배가 왼쪽으로 너무 기울어 있으면 힘을 어느 쪽에 실어야 하나? 균형을 잡으려면 오른쪽에 힘을 실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렇다면 반대로 배가 오른쪽으로 너무 기울어 있으면 어떻게 해야 하나? 힘을 왼쪽에 실어야 하는 것이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이고 행위일 것이다. 그렇게 해야만 배는 앞으로 힘차게 나아갈 수 있다. 다만 배가 좌우로 기우는 정도가 약해져서 안정적인 상태가 되면 사람들은 ‘뱃멀미’의 고통을 감수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우리는 한 사회와 국가의 안정과 불안정 상태를 이 배의 출렁거림에 비유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지금까지 대선 때마다 반복됐던 ‘죽기 아니면 살기 식의 투표’는 부질없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강 대표는 “자신이 지지한 후보가 당선되지 않았다고 해서 이민을 가겠다고 공공연히 말하는 ‘끔찍한’ 선거문화를 청산하자”면서 “대통령이 누가 되든 차분하게 대응하는 그런 세상에서 살고 싶은 것이 나의 꿈”이라고 말했다.

당선자는 ‘설득의 리더십’ 발휘하라

“나는 이러한 ‘조폭적인’ 투표 행위의 근본적 원인이 ‘제왕적 대통령’ 정치시스템에 있다고 생각한다. 막강한 권한을 가진 대통령이 마음만 먹으면 행정의 말단까지 간섭할 수 있다는 의식이 바뀌지 않는 한 수 십년 동안 우리의 발목을 잡아온 후진적인 정치문화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우리가 맹신적인 전범으로 받아들인 미국식 대통령제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연방제 국가인 미국에서 대통령은 군사, 외교와 연방 차원의 소수 업무만 전담하고 나머지는 모두 주정부가 맡고 있다. 그런데 한국 대통령은 ‘무식하게도’ 두 가지 업무를 모두 관장한다. 아마도 정해진 업무를 완벽하게 수행하다가는 감당하지 못하고 죽고 말 것이다. 어느 정도 ‘농땡이’ 치면서 하니까 안 죽고 사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대통령 1인에게 과도하게 권한이 집중돼 있는, 그래서 누가 대통령이 되느냐가 온 국민의 초미의 관심사가 되는, 나아가 대선 때마다 국론이 분열되고 국민이 갈가리 찢기어 분열되는, 이 후진적인 ‘제왕적 대통령’ 제도를 혁파해야 한다고 강 대표는 주장했다. 헌법 개정을 비롯한 전반적인 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보수 정권이든 진보 정권이든 모든 정권의 제일 과제는 개혁이다. 그런데 개혁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을 추진하는 과정이다. 지도자가 자기 혼자 잘 났다고 아무리 주장해 봐야 다수의 국민이 반대하고 따라주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자신을 반대한 사람을 포함한 국민을 설득하지 못하면 개혁은 결코 성공할 수 없다. 새로운 대통령 당선자와 그와 운명을 함께 했던 정치세력은 개혁의 본질이 국민을 설득하는 과정에 있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될 것이다.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는 당선자의 공약과 정책은 물론이고 그것을 시행하고 실천하는 과정도 꼼꼼하게 평가할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를 매년 발표함으로써 국민들이 새로운 대통령을 선출할 때 중요한 참고자료로 삼을 수 있도록 도울 것이다.”
/여의도통신=정지환 기자

강지원 대표의 이력서

▲ 서울대 정치학과 졸업
▲ 제12회 행정고시, 제18회 사법고시 합격
▲ 전주지검, 서울지검 검사
▲ 사법연수원 교수
▲ 청소년보호위원회 초대위원장
▲ 한국법심리학회 초대회장
▲ 국제마약학회 초대회장
▲ 청소년잡지 <큰바위 얼굴> 발행인
▲ 푸르메재단 대표
▲ 법률사무소 청지 변호사
상훈: 홍조근정훈장. 인제인성대상, 대통령표창, 국민훈장모란장 외
저서: <건전가정 30훈>, <욱하다 깨달은 성자>,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부모 이야기>, <나쁜 아이는 없다>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