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일전쟁의 승리가 일본을 망쳤다”

'새벽을 여는 강연'은 "좋은 사람이 좋은 세상을 만듭니다"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있는 한국인간개발연구원(KHDI)의 조찬강연을 지상중계하는 코너입니다. KHDI가 지난 32년 동안 매주 목요일 오전 7시에 1511회(금주 기준)나 진행해 온 조찬강연은 국내 최다 회수를 기록하며 최고 권위의 강연회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지난 7월 26일 롯데호텔 2층 에메랄드룸에서 후지와라 사쿠야(藤原 作彌) 전 일본은행 부총재가 ‘주기론으로 본 21세기 일본 사회시스템의 과제와 전망’이라는 주제로 강연한 내용을 정리한 이 기사가 독자들의 교양 쌓기에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편집자주)

“지금 일본은 과도기에 놓여 있다. 비유컨대 미로(迷路)에 빠져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일본은 이 미로에서 어떻게 빠져 나올 것인가? 과거에는 그 해답의 실마리를 얻기 위해 주로 미국과 유럽을 찾았다. 그러나 이제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화 시대는 끝났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일본은 그 대안을 아시아에서 찾아야 한다.”

일본의 지방은행 행장과 이사 등 임원 20여명을 이끌고 한국을 방문한 후지와라 사쿠야(藤原 作彌) 전 일본은행 부총재는 이렇게 강연의 서막을 열었다. <공수 포지션을 바꾸어-일본은행 부총재가 된 경제기자>라는 자전적 저서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그는 독특하고 역동적인 인생역정의 소유자다.

“일본을 대표하는 지성인이자 언론인과 금융인으로 유명한 후지와라 선생은 동경외국어대 불어학과를 졸업한 뒤 시사통신사에서 경제부 기자로 일했다. 이 통신사의 오타와, 워싱턴 특파원을 역임하며 금융 분야 취재와 연구에 주력했던 선생은 이후 편집위원, 해설위원, 해설위원장, 해설위원회 고문 등으로 일하며 일본은행의 변화와 개혁을 촉구하는 비평 활동을 의욕적으로 수행했다.

저널리스트의 경험을 활용해 논픽션 작가로 변신한 뒤에도 정력적인 저술 활동을 벌인 그는 지금까지 열권이 넘는 저서를 남겼다. 흥미로운 것은 일본은행이 자신을 신랄하게 비판해온 후지와라 선생을 부총재로 영입했다는 점이다. 한국 금융계의 시각에서 바라본다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파격이 아닐 수 없다.”

강연이 시작되기 전에 있었던 장만기 회장의 인물소개를 직접 옮겨본 것이다. 이날 장 회장은, 지금은 작고한 후지와라 전 부총재의 부친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장 회장의 설명에 따르면, 그는 “일제시대에 한국에서 교사로 일했던 인연으로 한국인 제자들을 많이 거느리고 있는 지한파(知韓派) 인사였다”고 한다.

“공적인 자리에서 사적인 이야기부터 드리게 된 것을 용서해 달라. 나는 한국과 몇 가지 인연을 가지고 있는데, 한국의 불행한 시기였던 식민지 시대에 한반도의 청진(함북)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사실을 제일 먼저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교사이자 언어학자였던 부친은 이곳에서 후학을 양성하면서 한국어를 비롯한 우랄 알타이어 공부에 몰두하고 있었다. 나아가 부친의 학문적 관심 영역은 한국의 샤머니즘 연구로까지 이어졌다. 덕분에 나와 우리 가족은 언어와 문화라는 매개를 통하여 한국인들과 깊이 사귈 수 있었다.

이러한 경험이 나로 하여금 기자와 논픽션 작가로 활동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아울러 일본에 나와 있던 한국 언론의 특파원들과도 자연스럽게 교류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강연의 본론으로 들어갈 시간이 됐다. 이날 주최측이 제시한 강연의 주제는 ‘주기론으로 본 21세기 일본 사회시스템의 과제와 전망’이었다. 그런데 후지와라 전 부총재가 직접 내놓은 단 한 장짜리 교안(敎案)에는 강연 제목이 ‘日本 SYSTEM 耐用年數(일본 시스템 내용연수)’라고 적혀 있었다. ‘주기론(週期論)’과 ‘내용연수’가 키워드인 셈이었다.

“내가 강연 제목으로 제시한 내용연수에서 ‘내(耐)’ 자는 인내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내용연수를 직역하면 ‘견딜 수 있는 햇수’가 된다. 영어로 표현하면 ‘라이프 사이클(life cycle)’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모든 사물에는 수명이 있다’는 의미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다시 말해 기계나 설비에도 수명이 있듯이 모든 사물이나 물건은 사용기간이 지나면 새롭게 재생해야 한다는 뜻이다. 경제학이라는 학문적 측면에서 보자면, 주기는 단기(2~3년의 재고 투자)와 중기(10년의 설비 투자)와 장기(30년의 대형 건물이나 설비 투자)로 나뉜다. 경제학에서는 이것을 ‘파동’이라고 불렀는데, 러시아의 니콜라이 콘드라체프는 기존의 주기보다 좀더 긴 50~60년의 ‘장기 파동’이 있다는 사실을 논증했다.”

그러나 스탈린에 의해 숙청당하는 바람에 콘드라체프의 연구는 오래 가지 못했다. 이것을 이른바 주기론으로 더욱 심화시킨 주인공이 바로 조세프 슘페터였다. 그는 경제뿐만 아니라 사회, 제도, 문화, 문명이라는 시스템이 과학기술의 발전을 뒷받침하고, 과학기술이 다시 이러한 시스템을 이노베이션 한다는 법칙을 발견했다.

“지금까지 설명한 것은 주로 경제 사이클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런데 정치학자들이 슘페터의 연구를 디딤돌 삼아 경제나 제도뿐만 아니라 국제질서에도 주기가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미국 워싱턴대의 조지 모델스키 박사와 워렌스타인 박사가 발견한 ‘헤게모니 사이클’이 바로 그것인데, 이 이론에 따르면 국제질서의 주도권은 대략 100년을 주기로 변화한다.

실제로 16세기는 포르투갈, 17세기는 네덜란드, 18세기는 영국 파트 원(Part 1), 19세기는 영국 파트 투(Part 2), 20세기는 미국이 주도권을 행사했다. 그렇다면 21세기는 어떻게 될 것인가? 미국 파트 투(Part 2), 중국, EU, 브릭스(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넥스트 일레븐(차세대 11개 국가) 등이 패권 후보(?)로 떠오르고 있는 상황이다.”

후지와라 전 부총재는 이러한 국제질서의 재정립 과정에서 동아시아의 역할에 대한 기대를 숨기지 않았다. 결속력이 유럽에는 미치지 못하겠지만 정치동맹보다 경제동맹이나 문화동맹과 같은 ‘느슨한 연대’를 속도에 구애받지 않고 추진한다면 국제사회에서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어서 그는 한 장의 도표를 제시했다.

“나는 경제부 기자로서 일본 거품경제의 붕괴를 목격하면서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일본의 무너진 경제시스템을 어떻게 재건할 것인지 논의하기 위해 구성된 ‘금융제도조사위원회’에 위원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여기서 내가 주목한 것은 ‘왜’ 일본경제가 붕괴했는가라는 의문이었다. 자연스럽게 일본에서 근대국가가 탄생한 이후의 과정을 차분하게 되돌아보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이 도표에서 나타난 것처럼, 새로운 질서와 제도가 탄생하기 위해서는 약 40년(1868~1904~1945~1985~2025)의 주기가 필요했다는, 일본 나름의 법칙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아울러 새로운 질서, 제도, 시스템을 주체적으로 소화하지 못한 채 외부적 압력에 의해 구축한 것이 가장 큰 문제라는 사실도 알게 됐다.”

실제로 일본은 1868년에는 미국 페리 제독의 개항 요구, 1945년에는 미국 점령군 사령부(GHQ; General headquarters)의 패전 이후 청사진 마련, 1985년에는 미국 주도의 플라자 합의에 따른 환율조정이라는 외압에 의해 사회시스템을 구축하는 과정을 밟았다. 그런데 ‘일본의 영광’으로 기억되는 1904년의 러일전쟁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명치유신은 부국강병과 식산흥업을 명분으로 내걸었지만 실상은 모든 분야에서 서양을 모방하는 것이었다. 군사 부문에 가장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제국주의 침략전쟁의 막차를 탄 것도 그 연장선 위에 있었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40년 주기론에 따르면 과거의 시스템을 끝내고 새로운 시스템을 준비해야 하는 시기에 ‘일로전쟁’이 일어나고 말았다.

많은 사람들은 일로전쟁을 일본의 우수성을 보여준 전쟁으로 기억하지만 내 생각은 전혀 다르다. 당시 제정 러시아는 이미 자멸하고 있었고, 일본은 우연하게 ‘행운의 승리’를 주웠을 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불행의 씨앗’이었다. 자만에 빠진 일본이 내용연수(사용기한)가 지난 줄도 모르고 낡은 과거의 시스템을 연장하고 말았던 것이다.”

후지와라 전 부총재는 1904년 러일전쟁 이후 일본이 언덕에서 굴러 떨어지듯이 전락의 역사를 걷게 됐다고 말했다. 그러다 보니 거품경제 붕괴의 시발이 된 1985년 플라자합의 당시에도 일본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냉전체제의 붕괴, 인터넷과 IT경제의 등장이라는 세계사적 변화의 조짐을 읽어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거품경제의 붕괴는 ‘제2의 패전’이라고 할 수 있다. 1945년 제1의 패전과 달리 제2의 패전은 ‘병기를 쓰지 않은 전쟁’이었다. 일본은 ‘잃어버린 10년’이라는 폐허를 딛고 ‘제3의 개국’을 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그러나 일본은 노구치 유키오가 평한 대로 ‘1940년 체제(군국주의 시스템)’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 낡은 시스템에서 벗어나 새로운 일본을 만들기 위해서는 ‘개인의 의지가 반영된 국가 만들기’가 필요하다. ‘권리와 의무를 수반한 성숙한 시민’만이 새로운 일본을 만들 수 있다고 확신한다.”

여의도통신=정지환 기자 ssal@ytongsin.com

후지와라 사쿠야 전 부총재의 이력서

▲ 동경외국어대 불어학과 졸업
▲ 시사통신사 오타와 특파원, 워싱턴 특파원
▲ 시사통신사 편집국 경제부, 편집위원, 해설위원, 해설위원장, 해설위원회 고문
▲ 일본은행 부총재
▲ 히타치연구소 고문, 사장
▲ 동북전력(주) 감사역
▲ 매일신문사 감사역
저서: <맨얼굴의 일본은행 총재들>, <나의 생활대국>, <비즈니스 독본학>, <공수포지션을 바꾸어-일본은행 부총재가 된 경제기자>, <소안(素顔)의 일은부총재일기> 외